2.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상기 요소에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은 주의 바랍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요소: 강간, 외도, 가해자 옹호, 집단괴롭힘, 유혈, 살해 등
3.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존재하는 요소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구매하실 때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소재 : 미카즈키x여사니와, 불화, 견습사니와, 탈취, NTR,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
4. 이 책은 도검난무-ONLINE-의 2차 창작 책입니다. 공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개인적인 2차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한 혼마루에 사니와가 둘 이상 있는 경우는 드물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한 혼마루에는 사니와 한 명이 원칙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유다. 일단 가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았다. 일생동안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은 신하된 자는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그런 무사들의 손을 거쳤던 검들도 당연히 중시하는 것이다.
사니와가 둘 이상일 경우 아주 분업이 잘 되지 않고서야 명령계통에 혼선이 생길 수 있고, 자신이 쫓는 사니와를 필두로 계파갈등도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었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 무릇 비슷한 이를 따라 모이는 법이고, 무리가 모이면 자연스레 시선이 외부로 돌아가는게 필연인 법. 감히 주인에게 항명이란 용서할 수 없는 사안이나, 도검남사들은 신에 가까운 이들이고 사니와는 그저 인간이었다. 주인이란 이유로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나, 언제든 고개를 쳐들면 압도적으로 불리한 쪽은 주인 쪽이다. 그렇기에 주인의 말에 가치를 부여하고 주인의 말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체계이었다. 그런 이들이 둘로 나뉘어 싸운다면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사니와의 업무량이 과중하다고 한들 혼마루에 상주하는 인원들과 분업을 할 지언정 사니와를 여러명 두지 않았다. 머리가 여러개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이 혼마루의 사니와는 둘이다.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었으나 상기의 이유로 이 상황이 달가운 검이 있을 리 없다. 달갑지 않아도 티는 낼 수 없었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이 올 줄 알았던 주인이 '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객을 홀대하면 주인의 품격에 먹칠을 하는 일이니 주인에게 하듯 객에게도 잘 대하라'며 신신당부 했었다. 최소 백년, 백년 그 이상의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있던 검들이었다. 그동안 봐온 것도 있고 성정도 한 몫해 드러내놓고 내색하지 않는 것은 능숙했다. 그럴 가치가 있었다면 계속 지속됐을 사안이었다.
눈 감아준대도 가끔 눈 감아줄 수 없는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인간은 불쑥불쑥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채 선을 넘곤 했다.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마루 쪽으로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주인은 무릎에 앉아서 주인이 보지 않은 어제의 밭내번 상황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시나노 토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양 옆에 미다레 토시로와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가 앉아 이야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 얹거나 경청했다.
"잠시 시간 괜찮아요?"
서류뭉치를 들고 온 사니와는 기어이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품에 안겨 주인을 올려다보던 시나노도 초록색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적의에 가까워보였다. 미다레도 야마토노카미도 갑자기 나타난 훼방꾼을 올려다보다가 관심없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밝았던 목소리는 없었던 것처럼 말소리가 뚝 끊겼다. 이들에게 외부인의 위치란 방해꾼이나 괜한 군식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주인의 명은 명이고 그들이 갖는 감정은 좋지 않은게 당연했다. 그런 시선에 아랑곳없이 사니와는 서류뭉치를 주인 쪽으로 내밀었다. 짧은 시간 같이 지내면서 느낀거지만 이 인간은 신경줄이 제법 굵은 편이었다.
"원정부대의 편성 확인, 다시 한게 맞나요? 정말 이대로 할거에요?"
"했다니까요."
야마토노카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은 방해받은 것이 짜증이 났는지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 결성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주인의 권한이었다. 이방인에게 맡겨도 되는건가 싶었으나 끼어들려는 찰나 재차 사니와가 입을 열었다.
"야부사메 정렬 건에는 나기나타가 한 자루 이상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저번에─"
무릎에 앉아있던 시나노는 머리 위에서 으득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났네, 정말! 그러면 네가 그냥 하면 되잖아!"
주인이 결국 폭발하자 이를 어쩌나 눈치를 보던 미다레가 주인을 진정시키려고 주인의 소매를 붙잡았다. 화를 정면으로 받은 이도 미간이 좁아지더니 한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려다가, 입을 꾹 닫아버렸다. 맹렬한 기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사니와가 먼저 서류뭉치를 도로 품에 갈무리하고 할 말이 많지만 참아준다는 걸음걸이로 홱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주인은 이대로 끝난게 분한지,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는지 아랫입술을 몇번이고 깨물었다. 이 사이로 몇번이고 분한 침음성이 흘렀다. 그런 주인을 도와주기 위함인지 때가 좋은건지 카센 카네사다가 쟁반 위에 냉차잔을 들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무슨 일이니?"
"아, 카센상! 아까 손님이 잠깐 오셔서요."
미다레가 잽싸게 알렸다. 그러자 대번에 사태를 파악한 듯 카센은 여유롭게 웃으며 나부시 앉아 냉차잔을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주인, 아무리 화가 나도 주인의 체면은 잊지 마렴. '객을 대하는 태도에서 주인의 품격이 우러나온다'고 내가 누차 말하지 않았니?"
사니와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달래는 말에 주인은 조금 분이 덜 풀린 듯 했으나 씩씩거리던 숨은 가라앉았다. 한여름의 녹음보다 푸르른 녹안이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휘자 이내 뿌듯해졌다. 그렇다. 뭐가 됐던 결국 자신이 주인이다.
"응, 알았어! 잊어버릴래. 그러는게 낫겠지?"
"물론이지. 주인, 신경쓰지마!"
야마토노카미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지며 주인을 위로했다. 손님만 없으면 언제나 주인의 주변은 평화로웠다. 원래부터 주인을 좋아하던 혼마루였다. 주인에 대한 애정이 불청객이 온다고 해서 흔들릴 리 없었다.
손님 방으로 내어진 방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문을 열어두면 구석이나마 정원이 살짝 보였다. 볕이라도 들어오라고 연 문으로 느즈막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니와는 햇볕을 피해 앉아 서류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열어놓은 창 너머를 바라보지만 적막하기만 했다.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사니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 있다있다!"
"이러면... 안될텐데...."
"괜찮아요! 뭐 어때, 주인님 주변은 바쁜걸요! 심심하잖아요?"
이 목소리는 사요 사몬지와 이마노츠루기였다. 목소리가 가까워져오자 사니와는 서류에서 손을 떼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안된다는 사요를 이끌고 이마노츠루기가 문 안으로 허리를 쑥 들이밀었다.
"계세요-오?"
"들어오세요."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마노츠루기가 사요를 끌고 들어왔다. 사요는 영 내키지 않는 눈빛이었지만 이마노츠루기에게 질질 끌려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모양새였다. 사니와는 경련이라도 일어나는지 눈 끝을 한차례 파르르 떨었다가 웃어보였다. 귀찮은 기색이라곤 없는 포근한 웃음이었다. 이마노츠루기는 총총 걸어들어와 사니와의 앞에 허리를 숙여 앉아있는 사니와와 눈높이를 맞췄다. 언제나 해맑은 산죠의 단도의 얼굴에 악의는 없었다.
"어째서 손님은 저희랑 섞이지 않아요? 영 보이지 않아서 찾아왔어요!"
사니와는 이마노츠루기를 올려보며 씩 웃더니 서류뭉치의 귀퉁이를 눌러잡고 들어올렸다. 종이귀퉁이가 원래대로 쌓이며 빠른 속도로 파르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방에서 보았던 기계가 움직일때 들리는 소리와 닮았다.
"보다시피 일 때문에. 혼마루의 일이 이렇게 어렵고 많은 줄 몰랐어서,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배우려면 한참 멀었나봐요."
"헤에- 주인님이라면 척척 금방이시던데. 주인님은 요새 시간이 많아지셨는지 저희와 자주 놀아주셔요. 주인님이랑 나눠서 하면 안돼요?"
"처음은 언제나 힘든 법이니까... 곧 나아질 거야..."
새의 재잘거림처럼 밝은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사니와의 옆에 붙었다. 사요는 이마노츠루기의 옆에 앉아 사니와를 바로 옆에 앉는 것을 피했지만 이마노츠루기는 아랑곳없이 사니와의 옆에 앉아 재잘거렸다. 오늘은 무얼 했는지, 자신은 부대에 배정되지 않아 손이 남는 김에 이와토오시와 함께 밭내번을 했다던가, 밭내번을 하다보니 이 곳의 밭 자랑, 자신의 주특기, 온갖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나왔다. 소재는 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전부 이어졌다. 어린 아이의 즐거운 수다를 들으며 사니와도 간간히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길디 긴 이마노츠루기의 수다에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즐거워하자, 사요는 눈치를 보며 방 안에 틀어박혀 있기 보다 자신들과 지금 손 잡고 나가자고, 손님에게 혼마루 구조를 안내하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도 싫어하지 않을거라고 첨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이 손님이 오게 된 계기는 정부에서 마련한 3개월짜리 파견이었다. 인-탄-인지 뭔지 주인만이 익숙한 발음으로 이 제도의 불필요성과 이 제도의 효과에 대해 하카타가 주산하듯 장단점에 대해 열번을 토하는 오며가며 들은 이들에 의해 어떤 연유로 손님이 오는지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알고 있었다. 3개월만 체류하는 손님이라면 취지상 혼마루를 조금 돌아본다고 해서 책 잡힐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마노츠루기는 무언가 기억날듯 말듯한 얼굴로 입을 오므리더니 잽싸게 화제를 또 빼앗아갔다.
"그러고보니 손님은 이름이 뭐에요? 어째서인지 들은 기억이 없어요."
사니와는 곤란한 질문이라도 받은 양 눈을 크게 떴다. 말을 고르느라 잠시 말이 없어지기 전 아주 잠깐 지나갔지만, 사니와의 표정에 그다지 집중하고 있지 않던 사요조차 봤으니 순식간에 지나간 표정도 아니었다. 곤란한 질문이라도 했나 걱정이 들기 전에 사니와가 먼저 베시시 웃었다. 당연한 말을 한다는 농담조였다.
"본명은 발설금지고요. 오기 전에 부를 이름은 받았었어요. 그렇지만 사니와님이 계시니 제 사니와명을 말하기도 좀..."
"에-! 그런게 어딨어요! 지칭할 말은 필요한걸요!"
볼을 부풀리는 이마노츠루기의 반응에 사니와는 손 끝으로 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이 사람의 곤란할 때 버릇이 저건가? 사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인과 같은 버릇을 가진 사람이 또 있구나 싶었다. 타협점을 찾았는지 사니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귓속말로 알려줄게요. 그치만 역시 사니와님이 계신 혼마루니까 그걸로 부르진 말아주세요."
"좋아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저는 입이 무겁다구요!"
타인의 비밀 하나를 간직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특별한 지위를 가져다주지 않아도 뿌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이마노츠루기는 만족했는지 활짝 웃으며 팔을 파닥거렸다. 사니와는 그런 이마노츠루기의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잠시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울렸다 사라지고 사니와는 다시 허리를 폈다. 이마노츠루기는 들을때 놀랐는지 눈을 크게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신기한 사실이라도 깨달은 듯 목소리가 커졌다.
"신기해요! 주인님 이름과 똑같아!"
"그쵸? 그래서 쓰기가 좀 그래요."
"주인님 이름 예쁘니까! 손님도 빨리 혼마루가 생기면 좋겠어요! 부를때 굉장히 즐거운 이름이라구요! 분명 다들 좋아할거에요!"
이마노츠루기는 박수까지 쳐가며 까르륵 웃었다. 한눈에 봐도, 목소리를 높인 흥분은 주인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니 지금은... 음... 편하게 이마노스케今ノ介로 불러주세요. 계속 손님으로 불려도 상관없어요."
"헤에- 특이하네요. 거기다가 저랑 비슷해요!"
자신을 이마노스케라고 불러달라고 한 사니와는 사요도 돌아보았다. 이야기하면서 아무데서나 아무에게나 이야기를 흘리는 성격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얘기가 나와봐야 좋을 것 없는 화제였다.
"오사요도 말하면 안돼요?"
"응...."
사요의 나직한 긍정에 이마노스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사요의 눈에는 그 웃음이 서운한 기색으로 보였다. 무엇이? 무엇때문에? 그러나 시종일관 이마노스케는 웃는 상이었고, 주인이 아닌 손님의 일희일비에 신경을 쓸 정도의 정은 없기에 이마노츠루기도 사요도 별달리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다. 어찌되었건 이 대화는 주인의 곁은 경쟁자들이 너무 많고 주인이 바빠 무료했고, 새로운 인간에 대한 호기심에 시작된 것이지 손님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시간떼우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햇볕이 좋은 날은 언제고 축복받은 날이었다. 덕분에 밭에도 작물들이 잎 무성하게 건강히 자라고 있었다. 누군가는 검들이 성심성의껏 돌봐서 그렇다 하고 신사와 연이 깊은 검들은 기원이 닿아서일거라 뿌듯하게 웃었다. 작물은 나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수확해서 식료품에 더하기 위함이다. 풍요의 계절까진 멀었었다. 오늘도 밭내번으로 지정된 남사들의 땀이 뿌려지고 있었다. 오늘의 밭내번은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와 고토 토시로였다. 키가 큰 축에 속하는 나기나타와 어린 아이 체구의 단도를 같이 내보내다니 주인의 선택도 제법 짖궂은 데가 있다고 고토가 웃었지만 일은 허투로 하지 않았다.
밭에 물을 주는 작업은 힘을 요하지만 도검남사들에게 힘이란 인간보다 월등하니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남은건 반복노동에 따르는 지루함뿐이다. 토모에가타가 물동이를 들고 고토가 토모에가타의 한쪽 어깨에 앉아 물을 뿌렸다. 높은 곳에서 뿌리면 멀리 닿는다며 이마노츠루기가 이와토오시와 밭내번을 하고난 후 자랑했던 방식이었다. 고토가 심심한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보니 토모에가타상, 이 주변에 이상한 점 없어?"
고토의 말에 토모에가타는 모노클 너머로 눈동자를 굴려 밭을 훑어보았다. 주인의 공로와 검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밭은 풍요로웠고 병충해가 든 작물 없이 싱그럽기만 했다.
"무엇을 말하는가?"
국자의 물이 비자 토모에가타는 한 손에 들린 물동이를 고토가 뜨기 좋도록 들어주었다. 물을 떠 옆으로 뿌리며 고토는 비밀스러운 소문을 나눠주듯 소곤거렸다.
"전에 켄신이 말하는데, 밤중에 여기서 도깨비불이 나타났다는거야."
신격이 높아 신사에 연이 깊은 이시키리마루나 타로타치에 못지않게 제사에 대해 빠삭한 그이기에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고토도 그걸 알기에 토모에가타에게 조심스럽게 알려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토모에가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애초에 도깨비불은 삿된 것이 타야 나오는데 정명하고 영묘함 그 자체의 땅인 혼마루에 도깨비불이 나타날 리 없었다. 이 곳이 시간역행군의 습격을 받아 시체를 제법 치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토모에가타는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길 바라는지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어떠냐'는 얼굴을 한 고토에게 무심한 답을 내놓았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군. 그런 것이 떠돌 줄 몰랐다."
"에-! 진짜야! 지금까지 본 남사들이 몇인 줄...!"
"뭐가 진짜라는거야?"
"와아아악!"
"어이쿠."
갑자기 끼어든 제 3자의 목소리는 음산했다. 그 바람에 고토는 깜짝 놀라 토모에가타의 어깨에서 떨어질 뻔하고 토모에가타도 갑자기 흔들린 고토의 체중이 쏠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 했다. 등 뒤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낌새를 맡은 카슈 키요미츠가 짖궂게 씩 웃고 있었다. 내번을 도와주러 온 모양인지 하카마 차림이었다. 고토는 범인을 알자 원망스러운 목소리를 길게 뺐다.
"카슈상....!"
"미안미안.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카슈는 넉살 좋게 웃으며 국자를 토모에가 든 물동이에 담궜다 펐다. 양쪽의 밭이랑을 한명씩 맡으니 속도가 더 빨라졌다. 고토는 제가 말했던 것들 카슈에게도 털어놓았다. 주인이 걱정하니 주인 안들리게만 말하자던 암암리의 소문이었다. 혼마루 내에서 도깨비불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빛이 일어났다 한순간에 사그라진다는 둥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소문은 야전을 다녀오는, 주로 밤에 활동하는 이들에게 퍼져있었다. 야전에 자주 배치되는 단도들이 많은 아와타구치는 이치고 히토후리와 나키기츠네마저 알고 있으나 주인의 염려를 걱정해 입 꾹 다물고 있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래서 원인이 뭔지,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진 건 없었다. 불빛이 있다면 근방이 불빛을 받아 한차례라도 사물이 보여야 맞건만 신기할 정도로 누구 하나 밝아진 사물을 인식해 무엇이 타올랐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제 집 같은 혼마루니 익숙한 지형과 방향과 어렴풋한 거리감으로 발생지만 추측할 뿐이었다.
성의없는 듯 하면서도 착실하게 고루고루 물을 뿌려주며 카슈 또한 소문에 이야기 하나 더 얹어놓았다.
"나도 그거 봤어. 그래서 사실 이시키리마루상을 끌고갔거든? 외려 완전 깨끗함 그 자체라던데?"
혼마루에 괴담이나 이상한 일이 있다하면 이시키리마루가 자주 불려나오는 편이었다. 어찌됐건 그는 신사의 제신으로 받들어져 모셔진 경력이 길었다. 봉납과는 달랐다. 인간의 공력을 받아 그 기원을 신의 은혜로 베풀어주던 이였다. 그러다보니 어리거나 그런 쪽으로 연관이 적은 검들은 곤란한 일이 생기면 이시키리마루의 소매부터 붙잡곤 했다. 가장 정精해야 할 혼마루에 그런 이변이 생기면 더더욱 그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은 츠쿠모가미여도 격이 다르다는 증명이었다. 그런 이시키리마루를 아침 기도가 끝나자마자 큰일났다며 끌고 간 장소는 이시키리마루에게 이건 무슨 일이 생기려다가 사라질 정도의 깨끗함이니 안심하라며 다독임을 들었다. 그런 이시키리마루의 설명이 무색하게도 야전을 다니는 검들에겐 쉬쉬하며 정체 모르게 피었다 사그라드는 불꽃에 대한 소문이 퍼져있었다. 주인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고 객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남사들 몇이 이게 다 손님이 와서 벌어진 일이라고 투덜거렸다. 시기상으로 보자면 충분히 의심 가능했으나 마땅한 증거도 없는데 마냥 객을 적대할 순 없었다. 주인이 내린 명령은 별도의 명령을 거두지 않았고 줄곧 유효했다.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나 카센 카네사다의 지론으로 보자면 이치에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마음놓고 미워할수도,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 없었다.
토모에가타는 어린 검들의 뜬소문에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소문이 돈다는 사실마저 어리둥절할 정도로 이 곳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시키리마루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거다. 여긴 맑아. 이정도 영기라면 수확량이 원래보다 더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정결한 땅에서 왜 스멀스멀 뜬소문이 떠오르는가. 이유를 명확하게 아는 이는 없었다.
주인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지 어느 날에는 서류가 널부러진 책상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엉엉 통곡했다. 주인이 폭발하는 이유는 대개 뻔했다. 손님과의 언쟁에서 진 것이 분하여 제 분을 못이기고 그 난리를 친 것이라며 그 날 근시였던 소우자 사몬지가 이야기거리도 못되는 한심한 소문 이야기하듯 손사래를 살래살래 쳐가며 이야기 해주었다.
이렇듯 주인과 분란만 일으키는 손님이 갔냐고 한다면 애초에 약조한 3개월도 슬금슬금 지나고 있었다. 처음 하루는 날짜를 착각했나 생각했다. 이틀째에는 무슨 일이 생겼나, 무슨 일이길래 안가나 싶었다. 사흘째에서야 이마노스케가 입을 열기를 '기간이 연장됐다'며 주인을 묘한 눈을 바라보았다. 주인이 분한 표정으로 맞다고 맞장구를 치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늘어났다니 반기는 검들은 없었다. 이마노스케가 거짓말한 것이 아니냐 해도 사니와와 엮이면 날카로워지는 주인이야말로 저 사니와를 빨리 치우고 싶을텐데도 순순히 그렇다 인정한 걸 보면 사실일거란 말에 하나같이 그 말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불편한건 불편한 것이었다. 예정에 없이 길어진 기간에 미다레 토시로는 이제는 슬금슬금 마주치면 보지 않았다는 듯 새초롬한 표정으로 무시하고 지나갔다. 애초부터 붙임성이 없던 도다누키 마사쿠니나 오오쿠리카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기간이 연장된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주인이 일이 늘어났는지 이마노스케의 팔에 들린 서류철은 여전히 조금도 줄고 있지 않았다. 주인의 부탁으로 조사하고 있다며 일일히 도검들을 찾아다니며 의사를 묻고 조사하러 다니는 일도 그만두지 않았다.
다 한 서류를 사니와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도도도 뛰어오던 모리 토시로가 이마노스케를 보고 아는 체를 해왔다.
"어라, 이마노스케상."
"모리군. 안녕하세요?"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이마노스케는 여전히 무슨 속인지 알 수 없게 화사하게 웃었다.
"어딜 그렇게 가세요?"
"사니와님께 다 한 서류를 전달하러요. 모리군은요?"
"코류님께서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하셔서요!"
"아, 코류군의 이야기. 재미있죠."
주인을 찾아 여행했다는 자기소개답게 코류 카게미츠는 이야기거리가 풍부한 도검이었다. 이 혼마루에서 내력이 없는 검을 꼽으라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적으나 코류 카게미츠는 처음부터 여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탓인지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곤 했다. 덕분에 코류와 같이 있으면 이야기를 얻어듣곤 했다. 아마 켄신에게 해주는 김에 손이 비고 한가한 도검들을 불러모은 듯 싶었다. 모리도 기대에 찬 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이마노스케를 올려보았다.
"그치만 전 사니와님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어머나, 자랑스레 풀어놓을 이야기거리가 없는데요."
"있어요! 언제 떠나시는지에 대한 이야기."
모리의 얼굴은 본인의 신장은 제쳐두고 작은 아이가 좋다고 할 때처럼 밝기만 했다. 이마노스케를 당황시키기로 작정한 거라면 성공이었다. 이마노스케는 웃는 낯으로 굳어졌다. 그런 이마노스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듯 모리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이마노스케의 심장을 후벼파는 이야기는 면전에서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어라? 왜 그러세요? 너무 곤란한 이야기인가요?"
목소리가 떨리려는 걸 필사적으로 가다듬어 상냥하게 대화를 끝냈다.
"아니에요. 모리군이 원하는 이야기, 저도 들려 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모리는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이마노스케를 지나쳐 복도를 경쾌하게 도도도 뛰어갔다. 그런 모리의 뒷모습을 돌아본 이마노스케는 모리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보다가 본래 가려던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미 주인을 끌어들여 기간이 연장됐다고 말한 순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각오는 해뒀었다. 생각 이상으로 빨리 왔고, 생각 이상으로 정신적 타격이 큰 걸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이었다.
미카즈키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이마노스케는 줄곧 별 일 없었다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미카즈키를 대하곤 했다. 카센이 다회에 초대하면 미카즈키가 있어도 늘상 자신의 위치인 말객의 자리에 앉아 차를 즐겼고, 주인의 심부름으로 미카즈키랑 마주칠 때도 흐트러짐 없었다. 죄 짓고는 못산다더니 켕기는 이는 미카즈키 뿐이었다. 인두껍을 쓰고 해선 안될 짓을 했다고 해도, 죄를 지은 수치정돈 알고 있었다. 먼저 찾아가 사과를 꺼내면 애써 가슴에 묻고 돌아보지 않는 객의 상처를 헤집을까 염려되었고 이대로 모른 척 지내자니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주인에게 면목이 없었다. 주인에 대한 명도 어겼고 부부의 도리도 버렸다. 공적인 자리에서나 한두마디 받는 입장이 되었지만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 미카즈키와 주인은 여전히 부부관계였다. 주인을 향한 애정도 여전했다. 겨우 이정도로 식었을 애정이면 결혼이란 거창한 제례를 치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뤄왔던 일을 하는 데에는 큰 계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거창한 마음도 필요없다. 미카즈키는 결국 오늘 주인에게 사실대로 고하기로 결정했다. 이 이상 양심이 찌르는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 주인이 아무 일도 없고 자신도 비번이기에 작정하고 실행하기에 적합했다. 용서를 구하고, 주인의 방에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던 주인의 결정도 바꿔보고자 했다. 미카즈키는 그 길로 사니와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 안에는 근시와 함께 있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예전에는 근시가 있어도 이 집무실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었으나 그때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 때를 떠올리며 감은 눈은 다시 눈을 떠 현실을 보기 괴로웠으나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사실은 천년동안 인간들을 지켜봐오며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다.
"주인, 미카즈키 무네치카다. 독대를 청한다."
집무실 안에서 거짓말처럼 말소리가 끊겼다. 방 안에서 근시는 당연하게 자리를 비켜주려고 일어났다가 주인에게 '자신을 어떻게 혼자 둘 생각을 하냐'며 원망섞인 힐책을 듣고 있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미카즈키의 싫은 의심을 자꾸만 확신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내 문이 열렸다. 하치스카 코테츠가 근시인 모양이었다. 코테츠의 진품은 '미카즈키가 그럴 리 없다'와 '주인의 말이 거짓일 리도 없다' 두 개를 놓고 고민하는지 미카즈키를 보고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부부 사이에 이정도까지 걸어야 할 정도로 주인의 신뢰가 떨어진걸까. 미카즈키는 쓰게 웃었다. 그런 하치스카를 이해했다. 자신도 믿기 어려운데 하물며 타인은 어떨지 짐작하기에 하치스카는 물론 방 안의 주인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하치스카공은 지금 내 방에 가서 내 본체를 가지고 있다가, 내가 주인에게 해악을 끼친다 판단되면 당장 부러뜨리거라."
하치스카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자신을 당장 부러뜨리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가. 미카즈키의 말에 하치스카는 주인을 돌아보았다. 이정도까지 하는데도 이이를 의심해야 하냐는 눈빛이었다. 주인은 하는 수 없이 미카즈키의 독대를 허락했다. 물론 떠나는 하치스카 등 뒤로 미카즈키를 잘 감시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죄인을 바라보는 싸늘한 눈빛이 미카즈키를 향해 꽂혔다. '어디 네가 뭐라 하기 위해 왔는지 들어나보자'는 거만할 정도의 눈초리는 미카즈키가 집무실 안에 들어와 자리를 펴는 내내 따라왔다. 미카즈키는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자신의 긴 옷을 정리하여 조심히 자리에 앉고 주인과 눈을 마주했다. 만년 추운 지역은 전부 얼음으로만 덮인 대지가 깍아지를 듯 바다 위로 솟아 있다던데 그 만년설의 빙벽을 가져다 박아둔 눈이었다. 마주앉은 사이의 거리는 다섯보 남짓. 주인과 미카즈키와의 거리가 심리적 거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주인이 먼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멀어진 건 심리적 거리뿐만이 아니니 정신차리라며 뒤통수를 때리는 말투였다.
"그래서? 할 말이란게 뭔데?"
처음 육을 받았을 때부터 연인이지 않았기에 육을 주고 현신시켜준 이에 대한 예의는 남아있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미카즈키가 평소 부르는 호칭은 '주인'이었다. 아직은 부부로서 평등함보다 주종으로서의 상하관계가 더 강했다. 주인에 대한 예로 대하자고 술렁거리는 가슴을 다독여 차분함을 가장했다.
"주인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함이란다."
주인은 김이 샜다. 미카즈키가 주인의 방에 들어온 날 밤, 이야기는 전부 끝나지 않았던가. 새삼스레 말을 정리해서 자신을 다시 봐야할 정도로 그게 거슬렸던 사안일까. 이제 와서 잘못을 빌고 어쩐들 주인은 미카즈키의 접근금지령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처럼 딱 천하오검과 주인 사이로만 남고 싶었다. 주인의 방에 무단으로 들어와 덮치려고 한 죄라면 도해를 해도 부족했으나 미카즈키나 주변 검들의 반응이 외려 도해를 선택했다간 사니와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인지라 얌전히 있을 뿐이었다. 주인 안에서 그 일은 이미 결론이 난 일인데 미카즈키는 그 일을 왜 끌어오는걸까.
"그때 이미 했잖아? 잘못했다고."
미카즈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부디 주인이 자신에게 실망하더라도 자신에 대해 오해만 하지 말아주길. 그러기 위해서 비록 억울하나 자신의 처지를 주인에게 맞춰주기 위해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일전, 네 방에 들어가 네게 거절당한 후에 누워있을 때, 내 방으로 객이 찾아왔단다."
서두를 들은 주인의 손이 불안하게 움찔 떨렸다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눈썹도 살짝 떨렸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미카즈키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부른 건 아니었고 그저 객이 지나가다가 잠깐 멈췄을 뿐이었다. 그런 객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네게 거절당한 분을 풀기 위해 객을 강제로 내 방으로 끌어들였고, 범했다. 객만 오지 않았어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란 헛된 원망과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외면하여 일방적으로 수치를 덧씌운 너에 대한 화로 객에게 수치를 주고 말았다. 객을 두둔할 생각도 없고 나를 변명할 생각도 없단다. 이제와서 너를 원망한다 토로하는 것도 아니다. 객을 정중히 모시라는 주인으로서의 네 명령도 어겼고, 일평생 다른 이를 두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겠다던 부부로서의 맹세도 깨뜨렸구나. 이 일로 인해 네가 어떤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고 질투에 눈이 멀어 제멋대로 행동한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의외로 말을 시작하자 사형대로 향하는 죄수의 마지막이 담담하다고 서술되는 책의 구절처럼 놀랍도록 가슴이 차분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쿵쿵거리는 심장고동이 가슴보호갑을 두드리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숨소리조차 긁히는 바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주인은 기가 막혔다. 미카즈키 무네치카는 자신의 검이었다. 비록 이 혼마루에 묶여 자신 소유가 아닐지라도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지금 주인은 자신이었다. 안그래도 하나 더 있는 사니와가 신경 거슬려 죽겠는데, 그걸 쫓아내지도 못하고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하는 현실도 짜증나는데, 자신에게 내쳐졌다고 바로 다른 사니와와 배가 맞다니! 그도 모자라 밤을 보냈다고 고백하며 사과한다는 검의 상식이 자신의 상식 선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사니와와 섹스를 하지 않으면 검이 녹스는가? 그 몸뚱이가 망가지나? 내쳐졌다고 바로 그 여자를 방으로 끌어들였다니 본인을 오해하지 말래도 건덕지라도 붙여 오해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걸 사과를 한다? 도게자를 해도 모자랐다. 그런데도 저 태연한 표정은 무엇인가. 천년을 묵은 츠쿠모가미의 평온한 얼굴이 뻔뻔하게 보였다. 저절로 어금니가 부득하고 갈리며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그래?"
주인의 첫마디는 냉정했다.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목소리는 뒤늦게 깨닫고나자 재밌는 사실을 알았다는 듯 빠르게 웃음기가 섞였으나 결코 즐거워서 웃는게 아니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눈은 이제 경멸과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땠어? 오입질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나봐? 나한테 말까지 하러 오고?"
어떤 말이 쏟아질지 알 수 없었으나 나름 각오를 다지고 마련한 자리였다. 그 각오마저 산산조각으로 깨버릴만큼 주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비꼬는 말은 예리함으로 이름을 알린 명검들을 전부 세워둔대도 이길 수 있을 정도였다. 미카즈키의 눈썹 끝이 처연하게 파르르 떨렸다.
"어찌...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한 반응에 미카즈키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주인의 목소리는 결코 즐겁지 않았으나 한 편의 우스꽝스러운 광대극을 보듯 웃고있었다. 사람이 너무 화가 치밀거나 어이가 없으면 되려 웃음이 나오는데 그런걸까. 그만큼 자신의 행동이 용서받기 힘든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틀렸어? 굉장하네. 주인을 덮치려고 한 것도 모자라 주인이 안되니까 다른 사니와를 안고."
"주인, 그 때는 내가 서신으로 허락도 구하지 않았느냐? 강제로 덮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계속 피했잖아! 내가 발버둥치니 이불에 메다꽂은 것도 허락을 구하는거야? 헤이안 시대의 방식은 그래?!"
어째서 이야기는 저번부터 한 번도 접점을 이루어 진전되지 않는가. 미카즈키는 목이 탔다. 속도 같이 타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맞추어 오해를 풀어나가려고 해도 주인과의 이야기는 저번부터 계속 평행선이었다. 왜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가. 예전엔 이러하지 않았으면서. 미카즈키를 이리 박대해야 할 만큼 큰 일이 생겼다다면 왜 사소한 단서 하나라도 흘려 자신을 안심시켜주지 않은가. 결국 꾹꾹 눌러 참아온 미카즈키도 그동안 참아두느라 애써 돌보지 않았던 서운함이 터져나왔다.
"벽을 보지 않고자 눈을 돌리기에 그리 했다. 너와 내가 이리 평행선을 그리고 있을 줄 몰랐기에."
"아무 일도 없다고 했잖아! 왜 자꾸 보채는건데? 미카즈키 무네치카, 작작 좀 해!"
"왜 아무 일이 없느냐? 내가 지금 너를 두고 앉은 거리도,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있는데 왜 아무 일도 없다고 치부하느냐? 주인으로서의 판단이더냐? 이게 아무 일이 없다 미뤄두면 언젠가 사라지는 일들은 아니지 않느냐?"
주인의 목소리는 짜증스럽게 높아진 데에 반해 미카즈키의 목소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차분해졌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밝지도 어둑하지도 않은 이공간에서 안개가 달라붙는 서늘함만이 감도는 분위기를 차분함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지금 미카즈키의 말이 그러했다. 사랑해서 서운했던 감정은 타오르다 못해 주위의 열을 빼앗고 얼어붙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두근거렸던 가슴은 말을 할수록 서릿발이 심장을 감싸 천천히 굳혀갔다.
"그럼 전부 다 내 잘못이야?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안그래도 저거 안가고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자꾸 너까지 치대니까 짜증난다고! 일도 제대로 진행 안되는 것도 짜증나는데...!"
"인간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르니 나는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타인의 인내가 네게 당연히 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럼 주인인 내가 네게 시시콜콜 모든 일을 다 보고해야 해? 네가 내 일 대신 해줄거야? 무슨 일인지는 알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너의 일에 대해 조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 부부 사이의 예의를 묻고 있는 것이니."
"예의 좋아하시네! 부부라고 생각하는 건 자기뿐이면서!"
주인은 화가 주체가 안되는지 본인 앞에 놓여있던 책상을 손으로 탕 내리쳤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미카즈키는 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주인도 지르고서야 아차 했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돌렸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이건 무슨 말인가. 이 혼마루의 검들이 전부 결혼의 증인이자 주례였다. 이시키리마루의 주도 하에 타로타치가 따라준 신주를 세번 나눠 마셨고, 손을 잡고 신방으로 들어갔다. 그 손의 감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신혼이라 한다며 신혼기간이 꽤 길다 농도 나눌 만큼 그 기간은 짧지 않았다. 손님이 오기 전날 밤에도 다정하게 손을 잡고 품에 안아 한 이불에서 밤이 깊도록 소곤소곤 주고받은 이야기가 기억에서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이게 전부 미카즈키 혼자만의 기억이고 혼자만의 마음이라니. 당최 종잡을 수 없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럼 뭘 원하는데? 네가 잘했어? 발정난 개마냥 달려들어 아무 여자나 범했는데 내가 여기서 어떻게 처리해주길 바라는데? 이 문제를 나한테 들고와 고백한거면 적어도 이정도는 감수하려고 한 것 아니었어?"
홧김에 욱하고 나온 말인지 주인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주인의 말이 옳았다. 사니와가 통솔하는 도검남사가 정부에서 보낸 사람에게 상해를 입혀놓았으니 그 뒷수습은 오롯이 주인의 몫이었다. 또한 미카즈키가 말한대로 부부간의 예의로 보자면 미카즈키는 부인을 두고 외도를 한 셈다. 잘못을 고백하고 화를 낼 건 알고 있었고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특히나 인간에게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였고 부인이 거절했다고 다음날 다른 여자와 동침한 일은 주인에게 미카즈키를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저잣거리의 가십거리로 이 얘기가 떠돌았으면 남편의 사지가 멀쩡한 걸 두고 부인을 칭찬했을 이야기다. 미카즈키도 그에 대해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미카즈키의 화를 부채질하는 주인의 언행은 미카즈키의 예상과 너무나 달랐고 미카즈키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깨부시는 난폭함에 질려버렸다. 적어도 부부가 알기 전의 전혀 다른 모습에 미카즈키는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뒀던 손을 스스르 쥐었다.
"나는... 네가 적어도 나에게는 털어놓길 바랬다. 힘든 일은 같이 이겨내고 기쁠 때는 같이 기뻐해주기 위해 그 손을 잡았었다. 네가 나를 일방적으로 방치하여 화가 났었다. 그렇게만 했어도 그런 참람한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게다."
"잘못했다는건 말뿐이고 결국 내 탓하러 온거네."
왜 자꾸만 이야기는 쳇바퀴 굴리듯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감싸고 더이상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철옹성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미카즈키는 더 감정이 상하기 전에 그만두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이해를 해주지 않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할까. 이 이상 감정이 상하기 전에, 시간이 지나 다른 일이 차곡차곡 덮여서 떠올리지 않게 묻어둘 때까지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제발 그러기를 바랬다.
"그럼 이제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나는 네 처분을 기다리겠다. 더 이상 네게 무슨 말을 해도 무용하구나. 시간낭비다. 차라리 돌에 대고 얘기하고 말지."
미카즈키는 주인의 다음 말이 들리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키의 사내가 일어나 내려보는 위압감은 츠쿠모가미란 권위를 더해 결코 가볍지 않았으나 사니와는 그에 지지않고 사납게 치뜬 눈으로 미카즈키를 올려보았다. 눈을 피하지 않는 당당함 하나는 높이 살만 했다. 주인이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기 전에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한 발을 마루에 딛고 돌아보았다. 뭇 인간들을 홀리는 상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 이것도 내가 틀렸구나. 차라리 돌은 듣고 대답이라도 돌려주니 말이다. 베갯잇에 말을 걸어도 지금의 너보단 상냥하겠지. 틀린 걸 알려주어 고맙구나."
"도해 안당하는걸 감사히 여기시지!"
주인의 말은 미카즈키에게 다 닿지 못했다. 경쾌한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미카즈키는 주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으로 쏙 나가버린 뒤였다. 들릴락 말락한 말로 내뱉는 말은 오롯이 사니와의 진심이었다.
"더러워."
주인도 분이 안풀리는지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문 너머까지 들렸지만 미카즈키는 더이상 돌아보거나 되새겨보는 일 없었다.
성난 발걸음으로 타박타박 앞만 보고 얼마나 갔을까, 집무실에서 한참 멀어지고서야 화를 원동으로 빨리했던 걸음이 화가 사그라들며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이게 어떤 마음인데. 천년 세월에 정점의 권력자 옆에서 세상만사가 바뀌는걸 봐오면서 더 이상 생기지 않을 줄 알았던 마음이, 사랑이라 자각하지 못하고 그 감정을 호감으로 착각해서 맴돌던 마음을, 뒤늦게사 사랑이라 칭하고 곱게 다듬고 가꾸어 오롯이 한 인간에게 내놓았던 그 마음을. 자신의 망가져 가는 사랑이 안타까웠냐면 그건 아니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찢겨 모욕을 당하는데도 포기할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었다. 복도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서서 바닥만 바라보던 미카즈키는 손등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손등에 묻어나오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