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테온/피리2]에서 발간되는 이심결의 샘플 페이지입니다.
-이 책은 도검난무-ONLINE- 기반의 2차 창작입니다. 개인적인 설정, 허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실제 인물, 사건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미카즈키x사니와 요소가 있습니다.
-임신 소재 주의.
-여성 인권 유린에 대한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민감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읽으시는 분들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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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들고나니 온 몸이 아팠다.
머리에서 열이 솟구치느라 몰랐었는데 머리의 열이 조금 가라앉고나자 이제는 몸에서 몸을 태울 듯 열이 났고 부러지고 쑤셔진 연약한 인간 형상의 몸뚱아리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팠다. 시근거렸던 숨을 가다듬고, 익숙하게 피가 새어나오는 곳을 꾹 쥐어 지혈하며 벽에 등을 신경질적으로 퍽 소리 나도록 기댔다. 등도 이미 화살이 몇 대 쑤셔 박혀졌다 뽑힌 탓에 아프고 쓰라렸다. 어차피 자신의 것도 아닌 몸인데 자신의 것처럼 아픈 것이 그렇게 화를 돋우었다.
굳게 닫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 너머로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보나마나 근시겠지. 나오지 못할 거라 그렇게 엄포를 놨었는데 쉽게 열리는 것이 이상했다.
드르륵─.
그렇게 생각한 것이 우습게도 시선이 소리를 조금 늦게 따라가는 것은 아마 제 몸이 아파서일 거라 생각하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나오세요. 츠루마루 쿠니나가."
"요시모토 사몬지가 나를 찾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다분히 빈정거리는 웃음에 소우자 사몬지는 눈꼬리가 본체 날 끝 마냥 치켜 올라갔다. 굳이 주인이 쓰지 않는 옛 이름을 들먹이며 빈정거리는 폼이 어딜 봐도 반성의 기미라곤 없었다. 걸어온 싸움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을 자존심은 아니었기에 소우자 사몬지는 외려 고고하게 턱 끝을 올려 츠루마루를 내려 보았다.
"나오기 싫다면 주인에게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말을 너무 잘 들으니 근신을 감해달라 청해보지요."
어림없는 소리. 애초에 이 사단이 난 이유가 무엇이던가. 츠루마루가 이 방에 처박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역시 비꼬는 걸로는 소우자를 이길 수 없었다. 아마 사니와는 소우자의 말을 그대로 전해 듣는다면 츠루마루가 원하는 대로 근신을 세 달로 늘려 주리라 할 것이다. 아픈 몸이 지르는 비명보다 그것이 더 짜증이 나서 별 수 없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간다고!"
한달 후에 보자고 했으면서 불러내는 것은 또 뭔가? 그렇게 화를 냈으니 이제와서 대화로 잘 풀어보자며 보자는 것은 아닐텐데. 츠루마루는 소우자 사몬지의 뒤를 쫓으며 불편한 심기를 지울 수 없었다. 이 사단은 누가 봐도 자신이 잘못하긴 했지만 츠루마루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들어 거세게 항변했으나 사니와는 듣지 않았다. 츠루마루의 말을 한사코 거부한 사니와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서 근신을 명한지 하루 만에 독방에서 꺼내주었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수리실.
수리실 앞에 당도한 소우자는 먼저 문을 열고 츠루마루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세요."
흡사 도축장에 몰리는 소의 기분으로 수리실에 들어가자 츠루마루는 헛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다시는 저를 보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씩씩댔던 주인이 식신들이 움직이며 챙겨주는 수리도구를 쓰기 좋게 정리하며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식신들에게 맡겨두고 도움패를 써 츠루마루를 일찍 치워버릴 거라 생각했던 주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조금 놀라 츠루마루는 엉거주춤하게 사니와를 보다가 사니와가 손을 내밀고서야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본체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런 츠루마루를 보고도 사니와는 왔냐는 인사나 독방에서의 하루는 어떠냐는 빈정거림이라든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것은 또 기분 나빠서 츠루마루는 도로 나갈까 싶어 문가를 흘끗 훔쳐보았으나 소우자가 사니와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수문장처럼 문 앞에 바로 앉아있었다.
검이 수복될수록 츠루마루의 몸도 전장에서 얻어맞고 부러진 곳이 점차 나아짐을 느꼈다. 한결 숨도 편해지고 갈라졌던 상처들이 소리없이 붙어 아물었다. 체력도 충분히 쉰 사람처럼 돌아옴을 느끼며 츠루마루는 사니와가 아예 모질지는 못하구나 싶어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되었건 주인의 명을 어겼으니 다친 몸으로 근신해도 모자랐을 텐데. 자신의 말도 듣길 거부하고 자기 좋을대로 화를 낸다며 사니와를 향해 원망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멀쩡한 몸으로 한 달의 근신이면 형벌조차 되지 못했다. 머리나 식히란 뜻이겠지. 괜히 마음이 조금 들떠 츠루마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야 원,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근신이라니 지루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는걸?"
그 말에 사니와가 고개를 들었다. 츠루마루는 자신의 말에 반응해주는 것이 기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으나 사니와는 그런 츠루마루를 한번 쳐다보고는 묵묵히 검으로 시선을 내렸다. 주변의 평범한 사물을 보는 것처럼, 오늘도 변함없는 창 밖의 정원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무 감흥 없는 눈에 츠루마루는 어색하게 웃던 표정이 다시금 천천히 굳었다.
주인의 눈길만 보고도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아 소우자는 츠루마루의 뒤통수에 대고 '바보로군요.' 라고 속삭였다. 아무리 주인을 어릴 때부터 봐왔다 해도 주인이 성인이 된 지 오래됐고 사니와 노릇을 한지가 벌써 두 자리수 해거늘 단순히 정으로 용서해줄 수 있는 사안이라 생각했던가?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던가? 그렇다면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정말로 머리를 세게 얻어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지도 몰랐다.
이 혼마루에서 이 사안에 대해서 그를 두둔할 수 있는 검은 없었다.
***
"츠루마루 쿠니나가다. 나 같은 것이 갑자기 나와서 놀랐나?"
이러면 분명히 자신을 불러내준 사람이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놀란 쪽은 외려 츠루마루였다.
자신 앞에 어폐를 양 손으로 꼭 쥐고 경이로운 눈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는 이는 이제 막 모기식을 치뤘을까 말까한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였다. 백의 위에 치하야를 입었으니 무녀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정식 신관이 아니라 동녀에 가까웠다. 황급히 신주를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어린 여자아이 옆에 있는 것은 남색 제복을 곱게 갖춰 입고 반듯하게 서서 목에 작은 여우를 얹은 짧은 은발의 청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데 아이가 먼저 꾸벅 절을 했다. 한껏 고양된 기분을 억지로 눌러 참느라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이 빼꼼히 고개를 쳐드는 높은 목소리였다.
"아, 저… 츠루마루 쿠니나가님! 사니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니와라니? 제법 생소한 이름에 츠루마루의 금안이 기이한 빛을 띄며 눈이 가늘어졌다가 이 이상 답이 미뤄지면 저를 미워한다고 착각할지도 모를 어린 아이에게 미안하여 얼른 웃는 낯을 꾸몄다.
"아아, 네가 이번 시대의 주인인가? 잘 부탁한다."
사니와란 아이는 첫인사가 썩 나쁘지 않았다 느꼈는지 잇몸이 보이도록 웃으며 옆에 있던 청년을 올려보며 지시했다.
"나키기츠네. 그럼 츠루마루님의 안내 부탁 드릴게요!"
"맡겨주십시오, 아루지도노! 나키기츠네가 아루지도노의 부탁을 마다할 리 없다고 하고 있사옵니다!"
은발의 청년더러, 은발의 청년 목에 용케 서있는 여우가 청년의 이름을 나키기츠네라 지칭하는 것에 츠루마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검에 깃들어 있던 영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가 저뿐이 아니란 말인가. 아이는 여우의 말에 활짝 웃으며 그럼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쏜살같이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이에게 걸맞지 않은 긴 옷자락이 부한 잔상을 남겼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청년이 짧게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해."
"자네 진짜로 나키기츠네인가?"
유서 깊은 아와타구치의 가장 오래된 타도의 이름을 받아 자신을 지칭하는 청년이 생소했다. 그 이름을 간혹 듣긴 했지만 실제로 이리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라 츠루마루는 눈을 뜨자마자 놀라움투성이라고 느끼는 사이에 여우가 입을 열었다. 마치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여유로운 가르릉 소리가 섞였다.
"아와타구치파, 가마쿠라 시대의 타도 나키기츠네라면 틀림없는 본인입니다. 저는 나키기츠네의 오토모지만요. 나키기츠네가 타인과 교류하는 것이 서툰 탓에 제가 대신하고 있습니다요."
오토모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나키기츠네는 그러하다라고 말하듯 츠루마루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츠루마루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별별 시대를 살아왔지만 이건 또 놀라운 일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본체를 어깨에 둘러메고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이런. 이번 시대는 또 신기하구먼. 검을 인간 모습으로 현현시키다니."
"설명해줄게."
나키기츠네는 나가자는 듯 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부분 나키기츠네는 짧은 말뿐이 내지 않았지만 마치 옛 귀족의 저택과 신사를 합쳐놓은 것 같은 고택을 둘러보는 내내 오토모가 조잘거린 말을 종합하면 이랬다. 지금은 서기 2205년이며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시간을 넘어 공격함에 따라 시간정부에서는 시간을 넘어 그들을 물리칠 힘을 원했고 시간정부에서는 여러 방면의 힘을 찾던 중, 사물의 마음을 일깨울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를 사니와審神者라 지칭하고 각 성마다 두어 도검남사를 현현시켜 싸우게 됐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도검남사 뿐이기에. 대부분의 검들이 실전용이라기 보다는 제사용이나 보물로써 간직되었던 이들이지만 그들에게 누적된 역사가 짧지 않기에 금방 익숙해질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이 허언은 아닌 듯 츠루마루는 이 저택을 한번 둘러보자 대충 어떤 방식의 생활인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옛 시대에 익숙한 이들을 배려한 탓인지 각 방은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저택은 마루와 통로가 이어져 각 방을 연결했다. 마루마다 좋을 대로 앉아 있다가 츠루마루와 나키기츠네를 보고 인사하는 이들은, 츠루마루를 보고 아는 체하며 다가오는 검들 전부 옛날에 같이 지낸 적이 있는,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의 검들이었다.
같이 지냈던 이들이 이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실체하여 만질 수 있는 것에 기뻐져 들뜬 기분으로 나키기츠네를 따라 걸으며 츠루마루는 사니와를 화제에 올렸다. 아무래도 처음 눈 뜨자마자 본 사람인데다가 신주도 동녀도 아닌 아이가 자신 앞에 있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까 본 타로타치와 이시키리마루가 신관의 옷을 입고 있었으니 그 아이 또한 같은 도검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사니와는 이름이 뭔가?"
"아루지도노는 아루지도노입니다요. 검이 아닙니다. 이 곳의 유일한 인간이지요. 아직 어리시니 저희가 많이 보필해드려야 합니다."
그 아이가 주인이라니 자꾸만 들어도 생소했다.
첫 인사 때 츠루마루가 아이더러 주인이라 한 이유는 보통 검은 집안의 재산이었다. 여아가 시집갈 때 언제든 혼수예물로 보낼 수 있던 귀중품이었기에 집안의 아이도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 상황을 빨리 지나가야 했기에 되는대로 말했을 뿐 진짜 주인은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나키기츠네의 말은 츠루마루에게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얹어주었다. 츠루마루의 눈에 비친 외관만 해도 어린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기에 츠루마루는 턱 밑을 매만지며 짐작해보았다.
"뭐, 아직 모기식도 안 치른 아이인 것 같긴 했지. 그렇게 어린가?"
"지금 시대의 성인은 20세부터니 말입지요. 옛날이면 모기식은 치뤘을 겁니다. 올해 열 넷이시거든요."
"잠깐, 이 곳의 유일한 인간이라 하지 않았나? 부모는?"
"저희가 눈 떴을 때부터 혼자셨기에 알 길은 없지만 아루지도노가 짬을 내어 부모님을 뵈러 자주 출타하시니 그때 뵙겠지요."
"이것 참……."
츠루마루는 입 안이 써졌다. 성인 전의 아이라면 응당 부모의 품 안에서 크며 배우고 정을 받아야 할 때인데 혼자 떨어져 나와 나라도 아니고 역사를 지킨다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어린 아이에게 츠쿠모가미의 현신을 가능하게 할 힘이 있다고 성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덥석 쥐어주는 세태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아이를 가르쳐서 무장 역을 맡겨야 한다니 당연스레 아이에게 어려운 일을 밀어내는 인간의 잔인함이 현기증이 났다. 만약 커가면서 다른 일이 하고 싶다고 하면 어찌 될까. 나키기츠네도 츠루마루의 잇지 못한 말에서 같은 심정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의 지식도, 연민도 있었다. 나키기츠네 본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아껴주지 않으면."
그 무엇보다 단단한 의지의 말에 츠루마루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인조차 그 얘기를 듣자 잘 대해주자고 생각했다.
***
기름을 먹인 천으로 날을 쓸어내리듯 길게 닦아냈다. 이미 패인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진 검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고는 사니와는 본체를 검집에 조심스레 밀어 넣고 츠루마루에게 건네주었다.
"다 됐습니다."
사니와가 악을 써가며 츠루마루를 원수 보듯 싸운 후 처음으로 츠루마루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츠루마루의 말에는 수리를 하는 긴 시간 내내 무시했으며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니와에게 츠루마루는 대꾸도 안하고 본체를 빼앗듯이 거칠게 가져갔다. 사니와도 그 행동에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는지 잘 가다듬어 무표정했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가 마음을 고쳐먹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우자. 츠루마루를 다시 방으로 안내해주세요."
"그러지요."
계속 문 앞에 가지런히 앉아 방 안을 관망하던 소우자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츠루마루의 어깨에 손을 지그시 얹었다. 어서 벌을 받을 장소로 가라는 재촉이었다. 손에 실린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건만 백 마디의 말보다 무거웠다. 츠루마루는 소우자를 따라 문을 나서기 전 사니와를 다시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물어볼게."
달리는 마차의 문간을 붙잡는 것 같은 다급한 말에 사니와는 썼던 수리도구들을 정리하다가 츠루마루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재차 확인해야 할 정도로 간절할 줄은 몰랐기에 그의 입에서 그의 목소리로 나온 말이라고 실감나지 않았다.
츠루마루와 마주친 사니와의 눈은 방금 전 츠루마루의 화풀이에도 상관없다는 듯 금새 잔잔해져 있었다. 그 것이 마치 츠루마루를 완전히 놓아 밀어내버리는 것만 같아서 츠루마루 답지 않게 목 안이 껄끄러워졌다. 이제 한 달 동안 보지 못하니까 그 시간동안 츠루마루의 머릿속에서 멋대로 감정을 정리해서 기억을 고정하기 전에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썼던 마음은 정말로 쓸모없던 것인가?"
사니와는 무릎 위에 얹어뒀던 손을 마주 겹쳤다가 손가락을 얽어 꼬며 눈빛을 흐렸다. 할 말을 정리하는 것일까.
아까는 사니와도 화가 나서 마구 내뱉긴 했지만 검을 수리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미안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려한 검에 생긴 흉한 생채기에 날붙이와 돌쪼가리에 패인 자국들, 날을 파고들어 두더쥐처럼 갉아든 균열은 자칫하면 츠루마루 또한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고 고하고 있었다. 본체에 생긴 균열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을 것이니 전 부대가 살아서 귀환하도록 노력한 걸 칭찬했어야 했을까.
아니다. 츠루마루가 자신에게 마음을 쓴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쓸모 없었다에는 변함없었다. 그 동기만은 용서할 수 없다. 다쳐서 돌아온 이에 대한 동정이 거기까지 덮어줄 만큼은 아니었다. 이미 거기에 대해선 사니와에게 확고한 답이 있었다. 그 동기, 그 마음가짐으로 하여금 불러온 결과를 용서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금 여기서 두어야 할 것은 츠루마루가 어리석게 오지랖을 부려 일을 그르쳤다는 '사실'뿐이다.
사니와가 몇 번 이리저리 동공을 굴리더니 입을 꾹 다무는 것을 보고 츠루마루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빠득하고 어금니끼리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하-하는 차디찬 고소가 나왔다. 왜 자신이 화가 솟구치는 것일까 헤아려보기 전에 소우자가 문 밖에서 눈짓으로 빨리 나올 것을 재촉했다.
"아아, 주절주절 길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군."
자기도 모르게 수리실 문을 쾅 닫았다. 엄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치졸한 행동들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럼 한 달 후에 보지요."
"그래. 문제아는 실컷 반성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가버려."
독방에 안내해주고 난 소우자가 츠루마루의 본체를 조심히 받아들고 인사하자 츠루마루는 아예 소우자를 보지도 않고 틱틱 대며 귀찮은 새를 내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소우자는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이 눈도 많이 가고 손도 많이 가는 반항아에게 뭔가 한마디 해주지 않으면.
"코우세츠 형님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 때문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딱해서 못봐주겠군요. 어린아이처럼 칭얼대고 있는 꼴이 아주 우스워요. 왕실 보물창고에 들어갔다 오면 모두 그렇게 되나요? 아니면 연식을 거꾸로 먹게 되는 것인지? 그런 회춘이라면 한번쯤 들어갔다 나와도 나쁘지 않겠어요."
그 어느 때보다 열렬한 비꼼이었다. 이치고 히토후리도, 우구이스마루도, 어느 누구도 그런 이가 없음을 알면서도 매도했다. 소맷부리로 입가를 가리고 긴 속눈썹을 반쯤 나부시 감은 이색증의 눈은 조롱을 넘어서서 분노마저 느껴졌다.
화악―
짐승의 눈을 빼다 박은 금안에 불꽃이 튀었다. 공기를 할퀼 것처럼 반쯤 펼쳐진 손이 아슬아슬하게 소우자에게 닿기 직전 멈췄다.
본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지만 상대는 사니와의 근시였다. 멋대로 날뛰었다가 혼마루의 분위기가 더 엉망진창이 될 것을 알기에, 이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도 알기에 츠루마루는 내뻗었던 손을 꾹 쥐었다가 애꿎은 벽만 쾅 내리쳤다. 네가 뭘 아냐고 다그치고 싶어도 사니와가 이미 명쾌하게 답을 주었기 때문에 결국 츠루마루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근시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소우자 또한 그걸 알기에 애꿎은 벽만 쾅쾅 내리치는 츠루마루를 흘겨보며 가사자락을 여몄다. 저 치는 어쩌다 저렇게 돼버린 것인가? 무엇이 그를 저렇게 위태롭게 만들었나? 행동거지가 가볍고 경박한 듯해도 어디까지나 선을 지킬 줄 알며 오래 묵은 검 답게 지혜도 연륜도 있던 검이었다.
경멸하는 눈으로 어리석은 분풀이를 내려 보았다. 방문과 복도의 경계에 서서 소우자는 날 선 목소리로 덧붙였다.
"주제파악을 하는 데에 시간이 모자라진 않겠군요."
탁!
다소 거칠게 장지문이 닫혔다.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소우자는 문 앞에 잠시 멈춰 서있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고서야 사라졌다. 소우자가 떠난 후 이 작은 방 하나를 둘러싼 주변이 망망대해 위의 무인도마냥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같은 혼마루의 공간이 아니라 느껴질 정도의 적막이었다.
츠루마루는 귀찮다는 듯이 겉옷을 벗어 구석에 내던지고는 벌렁 드러누웠다. 소우자의 말마따나 시간은 여유롭다 못해 넘칠 것 같았다.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사니와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말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다른 얘기를 해볼까. 어느 쪽이든 결국 껄끄러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화창한 날에 근신에서 풀려 나오자마자 할 얘기가 아닌 줄 알지만 츠루마루가 없는 새에 자신이 조바심이 나서 급해져 있던 상태였음을 인정했다. 60자루의 검들 중에서 단 한 자루가 그렇게 조바심 나고 신경이 쓰여 가슴이 답답하다면 그건 다른 이들보다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다른 이들에게 가지는 감정보다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것이라며 쥬즈마루 츠네츠구가 인자한 목소리로 일러주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어영부영 헤매다가 때를 지나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기할 정도로 빨리 납득되었고 빠르게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정할 수 있었다.
"츠루마루.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니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바뀌었다. 츠루마루는 마지막 남은 차 한 방울까지 털어 넣은 후 사니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충분히 듣고 있으며 잡담을 섞지 않을 테니 편하게 말하라는 눈짓에 사니와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첫마디를 뗐다.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사니와는 대부분 정부의 명을 따라야 하는 것 아시죠? 저한테도 내려온 게 있는데... 좀... 중장기 대비 전략으로 내세워진 것이라 이게 좀 까다로워서요."
대부분 이렇게 판을 깔아놓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듣는 사람이 당사자인 경우가 많았다. 츠루마루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더 따라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으니 계속 하라는 무언의 재촉에 사니와는 가져왔던 서류를 츠루마루 쪽으로 밀었다.
"저는 츠루마루로 정했으면 하는데, 츠루마루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어서……."
츠루마루는 찻잔을 내려놓고 서류를 집어들었다.
[도검남사와 사니와직군 내 인간의 후세대 양성계획(안)]
받아들 때만 해도 이게 뭔가 싶은 표정으로 표지를 한 장 넘겼다. 츠루마루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심코 던져진 당혹감에 금안에서 파문이 일었다.
"...이건…!"
이런 놀라움은 바라지 않았다. 놀라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니와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걸 내미는가?
팔락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신경질적이어서 날카로웠다. 종이 넘기는 소리로도 충분히 무언가를 벨 수 있을 정도였다. 주구장창 좋은 말로 길게 주절거려 종이를 낭비한 쓰레기의 골자는 결국 도검남사로 하여금 인간 사니와를 취하게 하여 자손을 얻은 후 사니와로 써먹을 자재인지 확인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나온 자손이 인간일지, 아니면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일 지부터 확인하고, 초안인 만큼 '인간'인 사니와로 범위를 한정하여 실험하지만 추후 성과가 있을 시 '사니와' 직군 전체, 혹은 인간이라는 종에게로 범위를 확장시킨다는 얘기까지.
말이 좋아 전략이지 이종작물을 교배하며 나올 작물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인간을 실험동물로 보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사니와를, 주인을, 도검남사를 개나 돼지의 교배를 원하듯 가볍게 내뱉는 종이쪼가리가 같잖고 혐오스러웠다. 분명히 무시했을 처사일 텐데 이따위를 명령이라고 들먹이며 강제성을 들이민 사니와 뒤의 시간정부가 끔찍했고 동시에 이런 얘기를 들고 오면서 태연하게 다과자리를 마련한 주인이 천연덕스러워서 기괴천만하게 느껴졌다. 방금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넘긴 화과자가 속에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극약을 삼켰대도 이렇게 괴롭지 않을 것이다.
츠루마루의 표정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 나쁘자 사니와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큰 잘못을 저질러놓고 어수룩하게 어물어물 변명을 늘어놓는 멍청함이 들었지만 뭐라도 말해서 그를 달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직원 말로는 그냥 관계를 가지기만 하면 되니까…, 그 다음부터 어렵다면 도와줄 테니까 큰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고도 했고.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도 해줄 거라고 했으니까, 츠루마루는 그냥……."
"그냥 너를 안으면 된다고?"
와그작. 서류철이 통째로 츠루마루의 손 안에서 비틀렸다.
"정말이지... 이런 것 하나도 재미없어."
너무 황당하면 헛웃음이 나온다던데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 달만에 나오자마자 듣는 소식이 이런 것이라니.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왜 한 달동안 독방에 처박히게 됐는데.
츠루마루의 몸에서 발산되는 노기에 짓눌려 이대로 압사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츠루마루의 분노는 대단했다. 필사적으로 삯히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정부를 향해서는 쉽사리 꺼지지 않을 것이다.
사니와도 2주 동안 식음도 전폐해가며 뚜렷한 방도를 찾지 못해 자리보전도 했다. 간신히 결심이 서 모든 검들을 모아놓고 이 사안에 대해 말을 꺼냈던 날, 모두가 츠루마루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기대하지 않은 검이 없지 않았다. 주인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여인을 안는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한 검도 있었고 명목이 그렇다 한들 사니와의 배를 처음 타고 지나간 이가 자신이었으면 하는 것을 바란 검도 있었고 그렇게 한다면 사니와의 반려가 자신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한 검도 분명 있었다. 인간의 육신을 얻어 입으며 인간의 욕심도 같이 얻은 츠쿠모가미들은 그들의 시작이 인간이었던 만큼 인간과 비슷했다.
그런 이들을 전부 물리치고 츠루마루로 정하겠노라고 입에 올리는 순간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실망감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도 보이지 않게 눌러 감춰져 있을 뿐, 미묘한 공기는 남아있었다. 그것을 종식하기 위해서라도 츠루마루에게서 확답을 들어야만 했다.
한참을 부들부들 떨며 진정하려 애쓰는 츠루마루를 기다리며 잘못한 아이처럼 자신의 무릎 끝만 내려 보았을까, 츠루마루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우리에게 신격을 준 게 너다. 신위를 얻은 상태인 우리가 너를 안으면 그 뒤는 어떻게 될 지 듣지 못했어?"
알고 있었다. 정부도 아마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사니와를 더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일게 분명했다. 검들이 적당히 따르고, 사니와를 아끼고 지키려는 검들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게 빼앗길 것을 경계하는 도검남사와 어중간한 사니와가 있는 혼마루이기에 최적으로 골랐을 거라 사니와 앞에서 지껄였기에. 거기다가 사니와가 어렸을 적에 저질러 놓은 최악의 실수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효과적으로 사니와를 압박할 수 있었다. 이쪽저쪽 최악을 저울질 해봐도 츠루마루에게 주인격을 빼앗기는 쪽이 훨씬 더 나았다. 확실하게 마음은 정했지만 츠루마루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문 사니와를 보고 츠루마루는 으르렁거렸다.
"인간을 포기하겠다는 거냐? 너를 키운 다른 도검남사들의 노력 따위 안중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려야 할 만큼 그게 그렇게 중한 임무인가?"
"애초에 거부권 따위 없어요. 중하고 중하지 않고를 떠나 그냥 따라야만 하는 거예요."
"나는!!!!!"
터져 나오려던 말을 억지로 끊으며 큭 소리를 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욱신거리며 어지러웠다. 자신의 노력은 어떻게 되는가. 여태까지 사니와를 도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노력한 싸움터들이 눈 앞에 흐릿하게 스쳐지나갔다. 흡사 죽기 직전 보인다는 주마등처럼 흘러간 전장의 비명소리가 웅웅 거려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츠루마루라면 들어줄 거라 생각했어요."
사니와의 목소리는 씁쓸하면서도 담담했다. 마치 이럴 거라 예상했지만 아니길 바랬다는 목소리.
츠루마루는 결국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주인을 설득하려면 떠나게 되는 날에 조심스럽게 그러했다고 하고 싶었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놓았던 자신의 보물을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공유할 수 없었던, 츠루마루 혼자만 품고 있던 주인의 비밀. 자신을 움직인 전부였던 그날 밤의 울음소리.
"나는… 네가 반드시 현세로 돌아가길 바랬어."
"네?"
느릿하게 절절 끓는 목소리는 여태까지의 츠루마루라고 생각할 수 없게 고통스럽고 무거웠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츠루마루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사건이 있는지 사니와는 당장 떠오르는 기억들을 뒤져봤지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츠루마루의 손에 구겨진 서류철이 양분될 듯이 더더욱 세게 비틀렸다.
"어린 날의 네가, 엄마를 찾으며 우는 걸 들었다. 훔쳐 들으려고 한 건 결코 아니었어.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시도 인간인 너는 이 곳에 어울리지 않았어. 여긴 명검들의 무덤이나 다를 바 없고, 너는 언젠가 현세로 돌아가야 할 인간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싸운다면 분명,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나는… 그동안…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손으로 너를 이 무덤으로 끌고 들어가라고?"
이 모든 게 농담이길 바랬다. 잘 꾸며진, 아니, 농담이 아니어도 좋으니 기적처럼 누군가 나타나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이 이상은 너무 가엾지 않은가. 살아온 절반을 있어야 할 곳과 때를 잃고 억지로 정을 붙여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워 그렇게 노력했다. 관뚜껑을 두드리며 내질렀던 자신의 비명소리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여자의 비명소리가 겹쳐들려 귓가를 어지럽혔다. 꺼내줬으면 했다. 꺼내주고 싶었다. 주인을, 이 무덤에서. 내뻗은 손을 잡는 것이 늦기 전에, 백골이 삯아 바스라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꺼내줘야 할 주인. 자신이 도굴을 당하고서야 꺼내졌던 것처럼.
사니와는 어안이 벙벙하여 할 말을 잃었다. 말을 꺼내며 괴로워하는 츠루마루를 어떻게 도닥여야 할지도 몰랐지만 츠루마루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완전히 오판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정정해줘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하나를 꺼내어 들이밀면 또 다른 문제가 여럿 동시에 떠오르는 수수께끼 같았다. 일단 이러다가 또 서로 감정이 격해져서 싸우기 전에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싶었다.
"츠루마루의 의지가 그렇다면 제가 변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사니와의 말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어리석게 들렸다. 주인이라 여기는 여인을 탐해 취하고, 그 마음이 예전과 같을 수 있을까? 츠루마루는 그때 정말로 한 치의 변함없이 사니와를 예전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이 혼마루의 검들 중 누가 그 것이 가능할까? 인간과 함께 오래 지내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마음은 지나치게 인간과 비슷한데 어떻게?
"차라리 그 전에 너를 도망치게 해 달라 말해. 우리를 버리고, 사니와직을 버리고 떠날 수 있게.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모든 것을 걸고 네가 나갈 수 있게 할 테니."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츠루마루, 부탁이에요. 저의 첫 상대가 당신이었으면 좋겠어요."
첫 상대? 만약 정부가 바라는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상대를 바꿔가며 지속할 생각이었던가? 기가 막혔다.
"나는 안 해. 못 해. 널 지금까지 지켜온 건 이렇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츠루마루, 바깥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제가 이곳에서 죽어 지내는 건 아니에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어요. 당신이 도와준다면."
사니와는 이제 조금 답답해졌다. 자신은 이 곳에서 살아가고 이 삶에 만족하거늘 츠루마루는 대체 무얼 보고 있었던 건가.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기억에 츠루마루가 이렇게 견뢰하게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것은 처음이기에 충격 받았다. 어째서, 저번부터 이렇게 어긋나기만 할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츠루마루는 카슈를 제외하고 가장 신뢰하는 남사로 1부대를 꾸리라면 반드시 들어갈 도검남사였다. 여태까지의 헌신은 전부 사니와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발 밑이 푹 꺼지는 불안감이 허리를 지탱했다. 어느 다른 누가 사니와의 자리에 있어도 그 정도의 헌신을 아낌없이 내줄 남사였나? 사니와는 츠루마루 쿠니나가라는 개체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츠루마루는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언제나 이 세상의 밝은 것들을 전부 그러모아둬 이 생이 즐거워 미칠 것 같아하던 눈이 무덤의 흙처럼 말라 부서졌다. 소금기를 머금어 하얗게 바싹 마른 껍질 벗겨진 나무 같은 의지가 기적처럼 단단해졌다. 언제고 이해를 바라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독선이라고 욕해도 결국에는 자신이 옳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마. 나는 절대 안 해. 차는 잘 마셨어. 한 달 만에 만나서 좋았다."
츠루마루는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 성큼성큼 사라졌다. 그도 화가 났는지 떠나는 발걸음을 이기지 못하고 복도가 우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저런저런, 여인이 먼저 간절히 청하거늘 매정한 아이로다."
동자의 가벼움을 가장하고 있지만 인간의 품으로 다 감싸지 못하게 자라 하늘을 가를 듯 위엄 있는 나무의 지고한 무게를 지닌 목소리가 쯧쯧 혀를 차며 다가왔다. 사니와는 애써 웃었다.
"마음이 없으면 어느 쪽도 고통일 테니까요. 현명한거죠."
"그렇다면 저 아이는 세월을 잘 못 머금었도다. 절박한 여인의 손을 내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거늘."
"아직은 기한이 있어요. 그 안에 정책이 바뀔 수도 있고. 조급해하지 않을래요."
까마귀의 깃털을 짜 만든 것 같은 검은 옷 아래에 붉은 옷이 파도치듯 하늘거리는 이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곳에 있되 이 곳에 있지 않는 것 같은 무게감이었다. 코가라스마루는 애써 웃는 주인의 머리를 갸륵한 아이를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로고. 너무 걱정 말거라. 그 또한 너를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고 너 또한 바뀔 수 있음이라."
"코가라스마루는 일단 인사부터 하시는 게 먼저 아닐까요?"
"방금의 일을 보고 인사를 하라함은 이 아비에게 혼을 내달라는 뜻인가? 호오, 주인도 보기보다 영악한 면이 있구나."
물을 머금은 수선화 머리처럼 곧 떨어질 것 같은 웃음을 짓던 사니와는 코가라스마루의 너스레에 방금의 일 따윈 모른다는 듯이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코가라스마루는 억지로 웃는 아이를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 보았다. 고래로 지금까지 필요에 의해서도 몸을 섞는다지만 한 쪽에만 쏠린 정은 언제고 무거웠다. 절박하고 안타까우며 어떤 식으로든 파국을 부르기도 하고, 위험하기에 아름다웠고 흉했던 감정의 병풍도를 보며 코가라스마루는 그 끝이 어떻게 될 지 관망할 따름이다. 주인이 방향을 정한 이상 자신이 개입할 여지는 주인의 곁에 맴도는 다른 경쟁자들을 쳐내는 일 뿐이었다.
"그래도 몰래 보고 있으라고 안했어요."
그가 있다면 결국 다른 검들도 신경 안 쓰는 척 하더니 몰래 숨어서 전부 엿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으며 혼마루에 비밀이란 것이 없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 보고있었소'를 광고하는 것은 고검 나름의 배짱일 것이다. 토라진 목소리를 하자 코가라스마루는 싱긋 웃으며 츠루마루가 앉아있던 방석에 앉았다. 얼마나 열을 머금고 있었는지 방석이 아직도 잔열로 따뜻했다. 코가라스마루는 이건 의외라는 눈을 했다가 나부시 눈을 감으며 인자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언제나 걱정도 많고 생각도 많기 때문이지. 걱정말거라. 이 아비가 돌고 왔을때는 없었느니라."
"다들 츠루마루에게 뭐라고 하지 않아야 할텐데요…."
안그래도 다들 쉬쉬하면서도 츠루마루가 있던 독방을 질투 섞인 눈으로 쏘아보던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인의 입에 직접 오른 이이니 대놓고 말은 못해도 마음이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은 분명 있을 터였다. 사니와의 걱정에도 코가라스마루는 태연했다.
"주인의 연정이 줄 이를 한정한 이상 이건 필연. 주인을 내친 솜씨로 보자면 인과응보라고 봐도 무방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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